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노병은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것"
3김 시대의 마지막 거목,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던 영원한 2인자
'자의반 타의반(自意半他意半)',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충청도가 핫바지냐", "서쪽 하늘 붉게 물들이고 싶다", '정치는 허업(虛業)' 등 어록 남겨
묘비엔 '무항산 무항심(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
3김 정치시대의 마지막 1인,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1926~2018)로 지난 23일오전(8시 1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 김종필 전 국무 총리는 3김시대의 마지막 거목으로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였고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고 김종필 총리의 생전 모습
고인에게는 생전에 영원한 2인자, 협상의 달인, 정치 9단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고 김 전 총리의 삶은 민주화와 산업화, 한반도 평화와 반공 보수가 교차한 한국정치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인의 타계를 놓고 '박정희주의' 와'3김 정치'의 종언을 상징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는 '허업'이라던 영원한 2인자 고 김종필 전 총리
김 전 총리는 삶 전체가 영광과 오욕으로 굴곡진 한국현대사와 함께한 일생이었다.'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던 노(老)보수정객은 스스로의 말처럼 평생을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다 사라졌다.
김 전 총리는 굴곡과 반전에 이어진 삶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61년 5 . 16군사쿠테타를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 2인자로 산업화에 기여했지만, 군부독재 30년의 그늘을 만들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보수 대연합을 만들었지만 1997년에는 'DJP) 연합'으로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했다.
▲추미애 더민주당 대표, 고 김 총리
김 전 총리는 2015년 2월 22일 부인 박영옥씨의 빈소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치는 잘 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 본인에게는 허업(虛業) '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에게 건넨 "국민들에게 나눠 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따먹겠다면 교도소밖에 갈 데가 없다"고 한 말도 예언처럼 들어 맞았다.
▲고 김종필 전 총리,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필드에서
고인은 30대후반부터 숱한 정치적 곡절을 겪으면서 정치생명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했다. 권력형 부정부패 원조라거나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지역갈등을 조장했다는 원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지만 '혁명동기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4대의혹 사건' 당사자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이란 말을 남기며 외유길에 올랐다.
▲3김정치 주역들.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좌로부터. 사진 출처: 연합뉴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면장 집안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공주중, 고를 졸업한 뒤 일본 주오대(中央大)에 들어 갔으나 중퇴한 뒤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사범학교 졸업후 충남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직을 2개월만에 그만두고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사범대에 입학했고, 그해 광복을 맞았다.
▲젊은 시절 고 김종필 전 총리와 부인 고 박영옥 여사
1948년 육군 사병으로 복무하다 1949년 1월 육사 8기생으로 입교 그해 5월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정보국에 배속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고, 1951년 육군 중위로 박 전 대통령 조카인 박영옥과 결혼했다. 박씨는 당시 김 전 총리의 상관 박정희 중령의 조카로, 삼촌을 면회 온 박씨를 안내하면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김 전 총리는 2011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이) "데리고 갈 생각이 없나,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 않느냐"며 박씨와의 결혼을 권유했다" 고 했다. 김 전 총리의 부인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2015년 2월 , 64년간 동고동락했던 부인이 작고하자 거동이 불편했지만 5일간 빈소를 지켰다. "아내와 같이 묻히겠다" 는 뜻에 따라 김 전 총리는 국립현충원이 아닌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에 묻힐 예정이다.
타계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와 함께했던 정치인들은 남다른 소회로 그를 추모했다. 김 전 총리의 최측근으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 '용기'와 '르네상스 인간'이란 코드로 회고했다. 정 의원은 " 한국전쟁 때는 정보장교로 적진을 넘나들었고, 2인자 처신을 흔히 애기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이 나라 운명을 개혁한 혁명아엿다"고 말했다.
또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그가 중정에 의해 납치됐던 김대중 대통령과 손을 잡았던 것 역시 탁월하고 유연한 시대인식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며 '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용기:라고 했다. 또 예술적 면모에 대해 "팔방미인이었다.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능수하게 다뤘고 농촌시찰을을 갔다가 흥이나면 농악대 제일 앞에서 꽹과리를 두들겼다'고 했다.
▲젊은 시절 처 작은 어머니인 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하고 있는 고인
DJP 공동정부 총리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를 지낸 이한동 전 총리는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큰 별" 이라며 "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김 전 총리빼고는 이야기가 안된다"면서 " 정말 애석하다. 김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한편, DJP공동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본인의 장관 해임안 표결 당시를 회고 했다.박 의원은 "여소야대 국회여서 의원직을 가지셨던 총리님까지 표결해 개표결과까지 지켜보시고 부결을 확인한 후 제가 기다리고 있던 국회 국무위원 대기실로 오셨다"고 한 뒤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 박 장관, 건강하세요. 미운 사람 죽는 걸 보고 나중에 죽으면 이기는 거예요' 하셨다. 모골이 송연해졌고 '아 저래서 30대에 5. 16을 하셨구나'라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JP'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논란, "철회'국민 청원 올라와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한 국민훈장 추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김 전 총리가 현대사 주역이었고 총리로서 국가에 대한 봉사한 만큼 훈장 추서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상훈 업무를 담당하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24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김 전 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훈장 추서에 대해 '무궁화장으로 결정이 된 것으로 안다"며 ' 총리실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궁화장은 '정치 . 경제. 사회, 교육, 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구김 복지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렸한 사람'에게 수여되며 '국민훈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이다.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23일 김 전 총리를 조문한 뒤 "한국 현대사의 오랜 주역이셨고, 전임 총리셨기에 공적을 기려 소홀함이 없이 모실 것"이라며 훈장 추서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총리에 대한 정부의 서훈 방침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잇다. 김 전 총리가 5.16 군사쿠테타의 주역인데다,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창설자였으며 굴욕적인 한.일 국교수립의 협상 책임자였던 점을 들어 훈장 추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날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 전 총리의 훈장 추서방침을 철회하라는 개병 청원이 100여건 올라왔다.
고 김종필 전 총리는 충남 부여 태생으로 슬하에 1남 1년를 뒀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자녀 문제로 구설에 오르지 않은 유일한 '3김'이었다. 오랜 2인자 생활로 정보기관의 친. 인척 감시를 받으며 구설에 오르일을 경게했다. 장녀 예맀씨(67)는 코오롱 이원만 창업주 차남과 결혼 생활을 정리한 후 17년간 김 전 총리의 정치활동을 보좌했다. 아들 진씨(58)는 현재 김 전 총리의 아호를 딴 운정장학회의 이사장이며, 과테말라계 미국인과 결혼했다.
고 김종필 전 총리님의 명복을 빕니다.
-위 글 본문은 '경향신문 2018년 6월 25일(월)자 1. 3. 4면에 실린 기사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