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어머니는
14살 때 차가운 쓰레기더미 속에서
저를 출산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전
뉴욕의 거리를 전전했고
무료급식과 쓰레기를 뒤지며
굶주림을 해소했습니다.
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길거리에서 키워졌습니다.
값싼 모텔과 노숙자 쉼터를
찾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고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 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이름은
'노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공부가 좋았습니다.
가진 것 없는 제가
그나마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한권의 책을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어머니와 저는 두 모녀가 감수해야 할
위험한 시선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12학년을 다니는 동안
자그마치 12 곳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에 5권의 책을 읽었고
뉴욕의 모든 신문을 정독했습니다.
거리의 길바닥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이었습니다.
꿈이 생겼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나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는 꿈.
우리 가족이 더 이상 남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꿈.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사람들은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깨끗하게 입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11학년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께 이사를 하더라도
더 이상 학교는 옮기지 않겠다고 부탁했습니다.
대학에 가려면 저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의
추천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4.0에 가까운 학점을 유지했고
토론 동아리 참여, 육상팀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모든 곳이 저에겐 배움의 장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복지단체들이 장학금으로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사회단체에서 절 지켜봐 주었습니다.
절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인생과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전 결국
브라운과 컬럼비아, 암허스트 등
미 전역의 20여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
카디자 윌리엄스!
노숙자였던 저는
지금 하버드의 4년 장학생입니다.
"전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에
언제나 자신감을 가졌어요.
남들이 '노숙자니까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걸 너무나도 싫어해요.
전 가난이 결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제 이름은 카디자 윌리엄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저를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채용 최종면접 대기 중인 200여명의 지원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자신이 1,2학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하고 싶은 것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1. 꿈을 가져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 취업에만 목메지 말고 도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 힘든 이 시대 청춘이라면서 위안만 받으려다간 정말 아플 수 있다. 꿈을 가지고 달리는 것은 절대 아픈 일이 아니다.
2. 자신을 믿어라
긍정의 힘, 넌 할 수 있다고 믿어라. / 초조해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묵묵히 가라. / 기죽지 말고 당당해라.
3. 많이 알아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찍 부터 알아봐라. / 정부나 각종 단체에서 지원해 주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알아봐라. / 언제 어디서든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공채만이 답이 아니다.
4. 정신 차려라
원하고 또 원해라. / 학교공부+@ 다른 무엇을 준비해라. / 정신 똑바로 차려라 세상은 넓다. / 학교 안에서만 활동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라.
5. 겁먹지 마라
적극적인 자세로 도전하라. /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어야 한다. / 자신감을 가져라.
---
대학시절 선배들한테 지겹게 듣고,
선배가 되어 지겹게 해주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납니다.
‘형’의 조언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나 봅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 미리 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서
형처럼 되지 마라.“
1년 중 가장 짧은 달, 2월!
그만큼 더 의미 있는 하루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인생이 잘 풀릴 때도 있고,
뭘 해도 막히고 안 될 때가 있다.
잘 풀릴 때만 자신의 인생인가?
아니다.
잘 안 될 때,
꾸준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이 생각하는 정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 한다.
힘든 그 시기도 자신의 인생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은 성과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얻는 것이다.
- 이채욱의 『행운아 마인드』중에서
4000원 줄게
내 개 좀 봐줘 c:
<10분에 벌어질 수 있는 일>
대락 음악 세 곡을 들을 수 있는 시간.
매혹적인 여가수가 이성을 반하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
...
그리고 길가에 버려진 아기가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싸늘한 채로 식어가는 시간.
---
올해로 13년째 서울 관악구 난곡동에서
장애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
“가족이 꼭 피가 섞여야만 하나요?
신뢰와 자기희생의 준비가 돼 있다면
피로 엮인 혈연보다 더 끈끈한 가족이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그.
2010년엔 입양이나 보호시설에도
아이를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이
아이를 차가운 길바닥이 아닌 따뜻한 곳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곳에 두고 가도록
`베이비박스`를 만들었다.
교회 앞에 설치된 박스에
아이를 두면, 종소리가 울린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이 종소리가 울리면,
‘어떤 아기가 왔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 진다는 목사.
엄연히 불법인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는
염려와 반발도 듣고 있지만,
당장 오늘밤 차디찬 길바닥에 버려질
단 한 명의 아기라도 생각하면
그는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얼음 같이 시린 겨울밤,
길가에 버려진 아기가
자신의 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는
우선 품안의 어린 생명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만이 든다.
그는 "아이들이 지속 가능한 교육과 치료를 받으며
주위의 관심을 받는 게 내 생애 꿈"이라고 밝혔다.
지금 베이비 박스를 통해
그 꿈을 실현하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그의 꿈이 점점 이루어질수록
베이비 박스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꿈만 있고 실천력이 없으면 백일몽이다.
꿈 없이 일만 벌이는 것은 악몽이다.
"오늘이 제가 이 교복을 입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외교관을 꿈꾸던 평범한 고3이었던 한 소녀가
그녀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결정을 내렸다.
-
작년 4월, 동급생이 소녀의 동생을
주먹으로 가격해 쓰러뜨린 뒤
얼굴을 밟아 코를 부러뜨리고 배를 발로 걷어차
피를 흘리며 기절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는 명확한 처리보다 원만한 합의를 권했고
심지어 가해 학생은 ‘나도 맞았다’면서 동생을 고소했다.
동생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5월 16일,
‘퇴학을 당할 수 있다’는 담임교사의 말에도
부모와 함께 교복 차림으로 토론회에 참석했다.
학교 폭력 토론회 행사가 끝나갈 무렵
‘장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소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동생의 이야기를 전했다.
“학교의 눈에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길을 가려는
학생만 보이는걸까요?
장관님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주세요.
죽어가는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소녀의 마지막 말에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눈물을 닦았다.
9개월이 흐른 지금,
소녀의 동생은 작년 6월 말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다니는 중학교 교장이 교체되고,
왕따 예방 교육을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는 작년 9월 자퇴했다.
소녀의 발언이 보도된 뒤
학교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명했지만,
소녀가 느끼기에 학교는 동생이 폭력을 당했다는 문제보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몇몇 친구들은 소녀를 불러내
'왜 하필 교복을 입고 가서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소녀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졸업을 반년 앞두고 자퇴를 결정했다.
-
학교 폭력을 방관하는 어른들과 친구들 때문에
외교관이라는 소녀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꿈을 가졌습니다.
"학교 폭력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소녀가 웃으며 말합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곳에도요 :)
【솔개의 선택】
솔개는 새들 중 수명이 매우 길어 약 70~80년을 삽니다.
하지만 솔개가 그렇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힘겨운 과정이 있습니다.
솔개가 40년 정도를 살게 되면 부리는 구부러지고,
발톱은 닳아서 무뎌지고, 날개는 무거워져
날기도 힘든 볼품없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솔개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서서히 죽느냐
아니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것이냐
변화와 도전을 선택한 솔개는
바위산으로 날아가 둥지를 틉니다.
솔개는 먼저 자신의 부리로 바위를 마구 쪼기 시작합니다.
쪼고 쪼아서 낡고, 구부러진 부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쪼아버립니다.
그러면 닳아진 부리 자리에서
매끈하고, 튼튼한 새 부리가 자랍니다.
그리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신의 발톱을
하나씩 뽑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낡은 발톱을 뽑아버려야
새로운 발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새 깃털이 나도록
무거워진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버립니다.
그렇게 생사를 건 130여 일이 지나면
솔개는 새로운 40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결정입니다.
중요한 변화를 위한 선택의 기회가 찾아와도
용기 있는 결정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지,
무엇이 기회인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는
당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얻게 될 변화는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결정은 당신이 미래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천국으로의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
- 마지막 떠나는 길마저 외로운 이웃들
'알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파지나 고물 갖어오지(갖고 오지) 말어요.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집주인'
---
할머니의 떠남을 알리는 초라한 알림이었다.
고독이 훑고 간 할머니의 삶의 마지막엔
쓸쓸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에서 ‘페품 할머니’로 불리는
故 김모 할머니.
그의 죽음을 알리는 ‘알림글’까지 집주인이 붙인 이유는
생전 홀로 폐품을 수집하는 할머니를 도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리어카를 끌며
폐품을 수집하는 할머니를
집주인과 이웃들은 함께 돕자며 폐품을 모아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딸이 살고 있었지만,
딸의 집도 형편이 좋지 않아
할머니를 잘 챙길 수 없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아챈 사람은
주기적으로 들리는 고물 수집상 아저씨.
아무런 인기척이 없던 할머니는
반지하 방에서 보일러와 TV가 켜진 채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조용히 돌아가신 채로 발견되셨다.
---
홀로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
과연 이 할머니뿐만의 일일까요?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홀로 사는 시대.
소소한 기쁨을 나눌,
쓸쓸한 슬픔을 나눌 사람 하나 없는,
심지어 마지막 죽음마저 알릴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죽기 전
‘천국으로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에게
미리 자신의 유품을 정리해달라며 부탁합니다.
유품정리사라는 직업까지 생겨날 정도로
마지막 길을 소리 소문 없이 홀로 맞이하는 사람들.
외로운 개인, 외로운 사회의 또 다른 자화상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
잠시 잊고 지냈던 내 가족, 내 친구에게
전화 한 통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당벌레가 얼마나 이로운 곤충인지 아세요?”
2009년 7월 22일
개기일식으로 세계가 떠들썩 했던 그 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한 건
까맣게 타죽은 무당벌레들
“무당벌레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당벌레를 죽인 건 무엇일까?”
살아있는 동안 약 4천 마리의 진딧물을 먹고
살충제를 대신하는 고마운 곤충,
두 달간의 관찰 끝에 찾은 범인은
바로 아파트 조명!
무당벌레를 대신할 살충제를 뿌리면
땅이 오염되고
그 땅에서 자란 음식을 먹는 건
결국 사람인데...
무당벌레를 구하기 위해
소녀는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다.
뜨거운 조명을 피해
텃밭에 날아든 무당벌레들이 늘어
조명에 타죽는 무당벌레 수는 줄었지만
뭔가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조명의 위험성에 대한
홍보지를 나눠주었지만,
“학생이 공부나 하지 쓸데없는 짓 하네.”
“조명을 끄면 최신식 아파트로 보이지 않아
집값이 떨어져서 곤란하단다.“
소녀는 홍보지가 효과가 없자
강연장에 서기로 결심했다.
2010년 12월, 강연 단상에 오른 소녀는
청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파트에 설치된 메탈 힐라이드 조명은
날벌레들이 좋아하는 자외선을 방출합니다.
하지만, 자외선 방출을 99%이상 차단하는
무자충 램프를 설치하면
날벌레들이 날아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SNS로
소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무당벌레 한 마리가
죽은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가 죽은 거라는 걸.”
-
우리가 멋을 내고 재산가치를 높이기 위해
불야성을 밝히는 동안
수천 마리의 무당벌레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내게
꼬마 과학자는 진실을 알려주었다.“
-정석(경원대 도시계획학과 교수)
“세상에는 고군분투대신 나태와 오만함에
몸을 맡겨 버리는 천재들로 넘쳐난다.
그들은 한때 면도날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번쩍임과 예리함을 잃어버린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쇠붙이로만 살아가야 하리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느 서울대학교 합격자의 합격수기 글"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시장으로 달려갔다.
그 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 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 나 합격 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동안 나를 꼬옥 안아 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 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북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했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다.
그토록 !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애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일 찍 아버지께 가 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그냥 전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단 걸 얘기하려는 거였어요.”
“말은 제대로 하자. 넌 노력하지 않아. 넌 징징대는 거야.”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中
우리나라 절반도 안 되는 1천 7백만 인구의 민족이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2%, 아이비리그의 23%,
미국 억만장자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워렌 버핏, 빌 게이츠를 낳은
그들은 바로 유태인입니다.
세계에서 똑똑한 민족이라 자부하는 우리들도
그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고 있으면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과연 그들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들은 단연 ‘교육’에 그 공을 돌립니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13세가 되었을 때
성인식인 ‘바르 미츠바 (Bar Mitzvah)’를 올립니다.
이 때, 부모는 자녀에게 세 가지를 선물합니다.
바로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간’을 뜻하는 ‘성경’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을 의미하는 ‘시계’,
그리고 훗날 경제적 독립할 나이가 되었을 때
요긴하게 쓸 ‘하객 축의금’입니다.
특히, 이 돈은 부모가 갖지 않고,
전부 아이의 예금통장에 넣어 둡니다.
그리고 훗날 아이가 부모 품을 떠나는 18살까지
손을 대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미래’를 선물하는 셈이죠.
저축과 절약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는 소년 소녀들,
유태인들의 세계적인 파워는
이렇게 어려서부터 훈련 받은 결과입니다.
-
우리나라에도 ‘꿈과 미래’를
어린이들에게 선물하는 뜻 깊은 행사가
이제 막 발을 내디뎠습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SAP 코리아가 주최하는
‘미래를 내다보는 새’의 이름을 딴
‘삼족오(三足烏) 데이’!
매년 2월 22일 개최되는
이 행사에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발표합니다.
이들은 삼족오데이 발표를 위해
열심히 자료를 준비하고 스피치를 연습합니다.
친지와 지인들은 발표를 듣고,
앞으로 20세 성인이 될 때까지
이들의 분야별 전문 멘토가 됩니다.
멘토는 정기적인 유무선 만남을 통해
각자의 재능에 따라
진로 및 학습지도, 고민상담, 취미활동, 금융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언을 합니다.
바빠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SNS를 통해 소통하며,
사춘기 갈등으로 방황활 때도
멘토들이 나서서 지도할 것입니다.
과학자의 꿈을 가진 아이에겐 과학자가,
예술가의 꿈을 가진 아이에겐 예술가
멘토가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계획을 실천토록 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를 맘 속에 심어 줍니다.
더 나아가,
삼족오데이 참석 지인들은
이들이 사회에 나갈 때 유용하게 쓰도록
아이들 명의로 금융계좌를 만들고
종자돈을 적립해 줍니다.
이 돈은 이들이 20살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고, .
성인이 된 아이들은 든든한 지원금과 함께
사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삼족오데이’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현실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 의미 있는 행사에 저희 Planet Dream도
함께 뜻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아이들이 더 희망찬 꿈을 키우길 기원합니다.
희망찬 꿈을 안고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들이
제 2의 아인슈타인, 제 2의 빌 게이츠가 되어
대한민국을 빛내길 응원합니다!
한 학교 과학시간 도중에
실험쥐 한 마리가 없어지는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없어진 쥐를 찾기 위해
모두 헤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찾을 수 없자
선생님이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모두 조용히 해보세요.”
모리스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말했다.
“모리스는 앞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죠?”
구석에서 안절부절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리스를 보며 선생님이 다시 한번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모리스는 눈이 보이지 않아요.
선생님도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대신 모리스에게
훌륭한 청각을 주셨단다.
자..모리스 우리에게 실험쥐를 찾아주겠니?“
모리스는 남들보다 뛰어난 청각을
이용해 실험쥐를 찾게 된다.
훗날 모리스는 이 일을 회상하며
“제 인생은 그 때 완전히 달라졌어요.
저는 그때까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청력의 축복을 주셨다는
것을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순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위대한 뮤지션 스티비 원더의 일화 中“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고민 끝에 결정을 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그 후,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날들 하루하루를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져보았던
마지막 순간의 5분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에게도 이런 동기가 있다면
열심히 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매순간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시도할
‘동기’가 될 순간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 앙드레 말로
플래닛드림의 Your Dream Note는
당신의 꿈을 직접 표지에 디자인해서
당신이 당신의 꿈을 닮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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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최고의 복수다!
"두 소년"
한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시골에 갔다가
수영을 하려고 호수에 뛰어 들었다.
그러다 발에 쥐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았다.
귀족의 아들은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 주었다.
귀족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그 시골
소년과 친구가 되었다.
그 후,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웠다.
어느 덧 13살이 된 시골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의 아들이 물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고
아이들도 아홉 명이나
있어서 집안 일을 도와야 해"
귀족의 아들은 가난한 시골 소년을
돕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졸라
그를 런던으로 데리고 갔다.
결국 그 시골 소년은 런던의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 후 포도당구균이라는
세균을 연구하여 페니실린 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다.
이 사람이 바로 1945년 노벨 의학상을 받는
"알렉산드 플레밍"이다.
그의 학업을 도운 귀족 소년은 정치가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26세의 어린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젊은 정치가가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 무렵 폐렴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 플레밍이 만든
페니실린 이 급송되어 그의 생명을 구한다.
이렇게 시골 소년이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이 귀족 소년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굳게 지킨
"윈스턴 처칠"이다.
어릴 때 우연한 기회로 맺은 우정이 평생동안
계속 되면서 이들의 삶에 꿈과 생명을 주었던 것이다.
-
‘만약 내가 다른 이의
마음 속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줄 수 있다면
그에게 있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칼린 지브란의
“내가 만약 어떤 이의 마음속에” 中
“두 대통령의 만남”
1963년 민간 훈련기구인 ‘Boys Nation’ 대표단이
백악관을 방문한 사진이다.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소년이 미국 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다.
클린턴이 대통령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플래닛드림의 YOUR DREAM NOTE를
성경노트 겸 기도노트로 사용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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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와이프의 애교"
결..결..결혼이 하고 싶어요 흑흑~
'장미와 찔레'
"찔레꽃이라고 장미의 먼 친척뻘 되는 꽃이 있어.
그런데 이 둘이 친척이긴 하지만 차이가 있어.
찔레꽃은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히
작은 망울들을 터트리는데,
반면 장미꽃은 어느 한 철 짧은 기간에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거야.
처음에는 찔레꽃의 작은 망울들이 부러울 수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되는 게 장미지.“
"나는 인생에도 이렇게 장미꽃과 찔레꽃
두 가지 종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해.
일찍 빛을 보고 별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살아가는
찔레꽃과 같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낮은 위치에서 시작해서 오랜 기간 인내의 시간을 거치다
나중에 비로소 화려한 꽃을 피우는
장미꽃과 같은 인생이 있는 거지.
둘 중 어떤 인생을 선택 하느냐에 따라
자기가 감내해야 하는 삶의 과정이 달라지게 되는 거야."
- 조동성, 김성민의 『장미와 찔레』 中
"나는 꼴찌였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 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 날"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이 글의 주인공이신 박찬석씨는
경북대학교 총장 및 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가장 좋은 버전의 당신이 되어라!
당신의 최선을 다하라!
“독립유공자들의 후손, 그들을 아시나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우리는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1937년 일제의 앞잡이라는 허물을 뒤집어쓰고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이주 되기 전,
이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 선생이 사셨던 곳도 있고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던
안중근의사가 근무했던 ‘대동공보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던 대표적인 분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홍범도 장군,
헤이그 밀사의 한 사람인 이상설 선생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 입니다.
그 결과 러시아 지역은
1910년대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활발히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곳으로 평가됩니다.
모두들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열사만을 기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뒤에서 지원해주며
독립을 도왔던 그들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습니다.
이들만 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는 독립유공자 자손들도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때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진 박해에 시달렸던 후손들은 해방 이후,
상당수가 배움의 길에서 멀어졌고
오늘 날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은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내일 3.1절은 민족대표 33인을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셨던 모든 분들과 3.1운동에
동참 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는 날입니다.
더불어 독립유공자의 후손들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모진 고난을 이겨낸 분들 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길 고양이 밥”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거리의 뮤지션 제임스 보웬 앞에는
황갈색 고양이 밥이
담요 위에 앉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3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를 했지만,
그 후 어머니가 재혼하자
제임스는 18살 때
락 스타가 되는 꿈을 안고,
혼자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동료의 집을 전전하는 사이,
헤로인에 탐닉하고 노숙자로 전락했습니다.
제임스와 밥과의 만남은 2007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무렵, 제임스는 노숙자에게 배정된
공영 원룸 아파트에 거주하며
헤로인 중독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공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현관에 웅크리고 있는
초라한 고양이를 발견했습니다.
다리는 곪아서 부어 있었고
배에도 상처가 있었습니다.
제임스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집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하고 먹이를 주었습니다.
고양이를 기를 생각은 없었지만
3일 후, 영국 동물학대방지협회(RSPCA)에 데려가
화농 방지를 위해 항생제를 투여 했습니다.
치료비는 28파운드.
하루 벌이가 25파운드인 제임스에게는 큰 돈이었지만,
상처 입은 고양이를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양이를 보호하고 치료해 주는 사이
그의 인생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계속 주인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얼마 후, 회복 한 고양이를 밖으로 데려가 풀어주려 하자
고양이는 제임스에게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임스가 일을 하러 나갈 때,
고양이가 버스 정류장까지 뒤쫒아 왔습니다.
그 순간 제임스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임스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
나는 수원공고를 나왔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했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축구 하나만을 보고 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프로에 입단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
대기업 프로축구단 테스트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난 그때 별 볼일 없는
까까머리에 말라깽이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프로 입단을 희망하는 풋내기 축구선수가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수십 수백 명의 학생 중에서 계산 빠른 프로축구단의
감독이나 스태프의 눈에 들려면
뭔가 남들과는 달라도 분명히 달라야 했다.
키가 크거나 체격 조건이 좋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격이건 수비건 여하튼 특별히 잘하는
장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조건 중에 하나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좌중을 휘어잡는 스타성마저 없었으니
그들이 탐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대학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관동대 동국대할 것 없이
다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학교 김희태 감독님
눈에 들어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줄 알고 살았다.
덕분에 허정무 감독님이 사령탑으로 계시던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고
얼마 안 있어 일본 교토팀 선수로 스카우트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월드컵 평가전에 우리나라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 당시 나는 일본에서 활동했던 탓에 국내 선수 중에
가깝게 지내는 동료도 딱히 없어 늘 혼자 다녔다.
나를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고 각기 포지션에는
이미 이름난 선수들이 꽉 들어차 있어
갓 스물 넘은 어린 나에게까지
기회가 올 것이란 욕심은 애당초 부리지도 않고 있었다.
경험 쌓는 거고 본선 때한 경기 뛰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평가전에 임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은 평가전에서
나에게 예상 외로 많은 기회를 주었다.
처음엔 10분 정도 시합에서 뛰게 하더니
다음번에 20분을 그 다음번엔
전반전을 모두 뛰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감독님은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나를 시합에 내보낼 뿐 다른 언질은 전혀 없었다.
언어소통이 안 돼 감독님이 하는 말 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오른쪽(right) 왼쪽(left)뿐이라
다른 말씀을 하셨다 해도 알아듣지 못했을 테지만
언론도 나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난 언제나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을 뿐이고
감독님의 작전지시나 전략은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축구와는
또 다른 세계라 그걸 이해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미국 골드컵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어 시합에 나가지 못해
텅 빈 탈의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야 할
그 중요한 때에 하필이면 부상을 당했나 싶어
애꿎은 다리만 바라보며 맥이 빠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신 감독님은
영어로 뭐라고 말씀 하셨다.
무슨 말인지 몰라 통역관을 바라보았다.
박지성 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얼떨떨했다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감독님은 뒤돌아나가셨고
나는 그 흔한 땡큐 소리 한 번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멀리 있는 분 같기만 했는데
그런 감독님이 내 곁에 다가와 내 정신력이 훌륭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았다.
더욱이 그 말은 내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정신력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일지라도 오래전부터
내가 믿어왔던 것은 죽는 한이 있어도
버티겠다는 정신력이었다.
초등학교 땐가 중학교 때
축구부 감독님이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선수들에게
자신이 올 때까지 팔굽혀펴기를 하라고
지시하곤 휑하니
가버린 일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때도
나는 감독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자정이 넘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짐 캐리 오스카 패션"
날개는 거들뿐...
"평생 설탕물만 팔거요?"
제품개발에서 철저히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한
잡스는 인재를 영입할 때도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화법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1983년 애플의 주식공개 후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는
주주들의 요구를 받은 잡스는
펩시콜라를 코카콜라의 호적수로 키워낸 존 스컬리
당시 펩시 부사장을 데려오기로 하고 직접 그를 만나러 갔다.
당시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고만고만한 유망주 중
하나였던 애플의 '러브콜'에 떨떠름해하던
스컬리에게 잡스는 단 한마디만 남긴 뒤 발걸음을 돌렸다.
"평생 설탕물만 팔 겁니까? 아니면 저와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결국 며칠후 스컬리는 애플로의 이직을 결정했다.
“난 레드 제플린만 친다!”
김태원의 어릴 적 별명은
“김억삼”이었다고 합니다.
“억 마디하면 세 마디가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김억삼씨의 기타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소풍을 갔는데 친구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기타로 치고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들의 이목이 친구에게 집중되는 것에
질투가 난 김태원이 순간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레드 제플린만 친다.”
이 말 한마디로 김태원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소위, 한국 3대 기타리스트라 칭송받는
지금의 그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 때 당시 김태원은 기타 왕초보였고,
레드제플린의 곡은 초보자가 치기에는
난이도 있는 곡입니다.
모두들에게 거짓말을 한
김태원은 절박한 심정으로
기타를 연습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Babe I'm gonna leave you'
라는 곡을 오직 귀로만 듣고 익혀서
6개월간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 소풍날,
6개월 동안, 이 날만을 손 꼽으며
피나는 연습을 한
미래의 한국 3대 기타리스트가
전교생 앞에서 데뷔 무대를 갖게 됩니다.
무심코 던진 거짓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꾼 “동기”가 되었고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
꿈을 꿀 수 있다면 실현도 가능하다.
- Walt Disney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
나는 단지 열정적으로 궁금했을 뿐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나중이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냐!"
내가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들은 건 17살 때였다.
나에게 농구만큼 절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열일곱살 때 NBA캠프에 참가했을 때
나의 기는 꺾이고 말았다.
그곳에는 나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 보니 내 실력은 별게 아니었구나.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는 뛰어난 경쟁자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얘기했다.
"지금은 도저히 안 돼요. 엄마 나중이라면 몰라도."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호통을 치셨다.
"나중이란 누구에게나 오지 않아.
지금 최선을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이 한 마디에 나의 인생은 바뀌었다.
나는 현실에 눈을 떴고
그해 여름을 농구에 바쳤다.
그리고 캠프가 끝날 무렵,
마침내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해 NBA드래프트 1위는 바로 나였다.
나중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우리에겐 학창시절 SHAQ신발, 가방으로 추억되는
Shaquille O'neal의 이야기다.
-
지금보다 절실한 나중은 없다.
나중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와있는 지금이 아닌
행여 안 올지도 모를
다음 기회를 얘기하기엔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응답하라1997 13회 中
캠브릿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창망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나는 밤에만 꿈꾸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루종일 꿈을 꾼다.
-스티븐 스필버그
지금보다 절실한 나중이란 없다.
나중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눈앞에 와 있는 지금이 아닌
행여 안올지도 모를 다음 기회를 이야기 하기에는
삶은 그리 길지 않다......
- 응답하라1997 中
세 마리의 개구리가 우유통 속에
빠지고 말았다.
첫 번째 개구리는
“모든 것은 하늘에 뜻에 달렸다.”
라고 말하며 죽기만을 기다렸다.
두 번째 개구리는
“이제 끝이다.”
라고 말하며 그대로 죽고 말았다.
세 번째 개구리는
“나갈 방법은 없을까?”
라고 말하며 살아갈 방법을
궁리해보기로 했다.
세 번째 개구리는
천천히 헤엄을 치며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궁리하던 와중 발 사이에 딱딱한 것이
닿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헤엄을 쳐서 우유를 휘저어서
우유가 응고 된 것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개구리는
우유통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온 개구리는 나머지 두 마리를 위해
무덤을 만들며 묘비명을 이렇게 적었다.
“인생의 끝은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포기했을 때다.”
- 우유통 속에 빠진 개구리 에서..
사야할 것이 너무나 많은 당신은
가장 먼저 꿈을 버렸습니다.
그 꿈, 다시 삽시다!
꿈을 살아갑시다!
열두 살 때였다,
어느 날 학교 복도에서
스파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셨다.
"넌 절대 성공할 수 없어."
그 선생님은 나를 말썽쟁이 정도로만 생각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난 열여덟 살이었다.
나는 고향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그 선생님의 교실로 달려갔다.
"저한테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한 말씀 기억하세요?"
나는 금메달이 달린 리본을 움켜쥐었다.
메달은 선생님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내가 세계 최고 입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열두 살 때
세계제일이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분이었다.
-
챔피언이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챔피언은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소망, 꿈,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ㅡ무하마드 알리
당신은 존재하지만 진짜로 살고 있는가?
헐...
"너도 너희 아빠처럼 노숙자 되겠다."
.....
임군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다.
늘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폭력에 못 견뎌 임군이 5세 때
두 살 위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형편이 어려웠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만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병이 나 2009년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할머니(73)가 받는 정부 보조금 58만원이
'쪽방 가족' 임군네 수입의 전부였다.
임군의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세진이네 아빠는 노숙자고 엄마는 집 나갔다"는
소문을 냈다. 임군을 놀리고 때리던 학교 친구들은
시험지에서 임군 이름을 지우는 장난마저 쳤다.
"너희 아빠 알코올중독에 노숙자라며" 하는
같은 반 친구의 말에 주먹을 휘두른
2008년 중학교 1학년 여름날, 담임선생님은
임군에게만 매를 들었다. 임군은 그 일로 학교를 그만뒀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하냐" "그 아비에 그 아들이지"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싫어 사람도 대하지 않았다.
임군은 은둔형 외톨이처럼 변해 갔다.
임군은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이 나에게
노숙자 아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올해 3월 4일 임군은
강원도의 한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그는 "너무 오랜만에 학교에 오니 걱정된다"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남대문지역상담센터 박한우(65)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세진이네 집을 찾은 것은
2011년 6월이었다. 임군이
3년째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였다.
눈을 피하던 임군은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란
질문에 머뭇거리며 "PC방 알바"라고 답했다.
상담센터 전익형 실장과 직원들은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10여 차례 임군을 설득했다.
결국 2011년 12월, 임군은 집을 나와 상담센터로 갔다.
이후 임군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마포구 합정동의
대학생 무료 야학에서 국어·영어·수학 수업을 들었다.
영어를 ABC부터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상담센터에서 예습·복습을 했다.
사회복지사들이 공부를 도와줬고,
임군의 점심·저녁을 책임졌다.
공부 시작한 지 6개월 만인
지난해 5월 16일 임군은 고입 검정고시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합격한 그날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차량 637대분의
세금을 물라는 고지서를 받았다.
아버지가 노숙을 할 때 낯선 사람에게
인감증명을 떼어주고 명의 도용 사기에
휘말린 탓이었다.
다행히 상담센터와 인연이 닿은 변호사가
백방으로 뛰어 임군이 빚을 떠안지 않도록
'한정승인' 신청 절차를 밟아줬다.
임군은 계속 공부에 집중했고,
지난해 8월엔 대입 검정고시도 패스했다.
그는 올해 강원도 영월 세경대 경찰경호학과에
지원해 당당히 합격증을 받아 대학생이 됐다.
초고속으로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치른 임군은
또래보다 오히려 1년 일찍 대학에 들어갔다.
임군이 다니는 녹번동 염광교회, 롯데장학재단,
상담센터에서 이야기를 들은 독지가가 학자금을 대줬다.
임군은 4일 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매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임군은 "다시 학교에 돌아온 특별한 날이잖아요"라고 했다.
"자포자기한 채 쪽방 안에 숨어 있던
저 같은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안 해봐서 모르는 거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경찰관이 되고 싶어요."
마침내 쪽방을 떠난 쪽방촌 소년이 말했다.
-
임세진님이 경찰관이 되는 꿈을 이루셨으면 합니다.
- 조선일보 이정원 기자. 2013.03.05 기사 발췌
기사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05/2013030500095.html
"남의 뒤를 따르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을 아버지처럼 바라보는
3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던 한 소년.
그는 자랑스러운 형이고 싶었기에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양복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낙담하기 보다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고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길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자투리 천을 엮어 나비넥타이를 만들어 매고는
양복점 손님들이 반응을 살펴보았다.
손님들은 여러 색상이 섞인 그의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양복점 주인은 빈정거렸다.
"넌 양복점 판매원이지, 서커스 광대가 아니야.
그런 알록달록한 넥타이는 아무 소용없어!"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각에 확신을 가졌고
20살이 되던 해, 막내 동생의 자전거와
자신의 아코디언을 팔아 낡은 편물 기계를 사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점차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옷을 만들어갔다.
하루 16시간 일하며
독특한 스타일의 옷을 찾는 손님들의 취향을 눈여겨보다가
당시 젊은이들은 보다 편하고 개성이 강한 옷을 찾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 년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베네통> 캐쥬얼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는 세계 의류업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세대가 바뀌면서 취향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유명 회사를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뒤를 따르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
- 루치아노 베네통
남자 배우들의 증명사진.jpg
최고의 꿈은 당신이 깨어있을 때 일어난다.
“안철수식 공부법”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려면 최첨단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매달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그걸 익혀야 되거든요.
그럼 공부할 시간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썼던 방법이
잡지사에 전화를 하는 거에요.
그러고 나서
“이런 기술이 새롭게 개발이 된 게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글을 쓰겠다.”고 해요.
그러면 잡지사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좋다고 하고 원고마감까지 주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요.
그런데 마감을 받았으니까...
저는 책임감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러다 보면 기사 마감을 약속해놓고
무산시키면 안 되니까
잠을 더 줄이든지 틈틈이 시간을 내서 그걸 만들죠.
그래서 잡지사에 글을 주고 나면
정말 죽을 고생을 하지만
결국은 그 분야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알게 되거든요.
-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 놓으면 그것은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그것은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되는 것이다.
-그레그 S. 레이드(Greg S. Reid)-
"고등학교 자퇴서"
세상에 알기엔 아직 어린 나이
세상에 의지하기엔 이미 커버린
나는 이 혼돈속의 정리를 원한다.
두 가지 세계에서 외면당한 설움
나와 같은 공허속의 이름 신세대..
우리를 바라보는 포장된 시선들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가 좋았다고 한다.
그건 나약한 사고이다.
어느 시간속에 존재하든
자신의 행복은 자신의 책임이다.
시대의, 시간의 책임이 아니다.
나와 같은 신세대여 아무런 대책없는
미래에 대한 넋두리를
이젠 닥쳐주었으면 한다.
냉정한 내 발언에 숨이 막혀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약한 영혼이여!
도피의 끝은 진정 죽음이 아니다.
영원히 깨어있다.
날개를 잃어버린 채 추락하는
영혼이 될 것이다.
나는 두 가지 길 중
사람들의 발자취가 없는
가시밭길을 택하련다.
나의 선택에 따르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
가시를 밟으면 피를 흘리듯
새로운 곳에 내가 먼저 갈 수 있다면...
-
많이 알려진 이 글은 90년대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고교자퇴서.
그 후, 그는 우리가 기억하듯.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아름다운 도전”
올해 92회를 맞는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
사상 최초로 자폐증을 앓고 있는 여성이 나섰다.
지난해 몬태나주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알렉시스 와인먼(Alexis Wineman)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각종 미인대회에
단골로 출전해 온 다른 참가자와는 다르다.
11살 때 발달장애(PDD)와
경계성 아스퍼거증후군(BAS) 진단을 받았다.
이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고
정형화된 행동을 반복하는 증상이다.
"친구들과 사귀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대응하는 법을 배워 극복했다."
그녀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말하며
자폐 증세를 자각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까지는
긴 고통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와인먼은 자신을 숨기는 대신
고등학교에서 각종 공연에 참가,
치어리더로 활동,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면서
세상 밖으로 뛰어드는 것을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자폐증 환자 지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크면서 바란 것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젠 자폐증도 나의 일부라고 인정하게 됐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면 삶은 훨씬 쉬워질 것
자폐증을 흔히 있을 수 있는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자폐증이 있는 사람을 구석으로 밀어낸 후 잊지 말고,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그녀의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은
사람들이 너에게 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던 것을 했을 때이다.
내가 교직원 연수중에 있었던 일이다.
수업 참관을 위해 들어간
여교사 도나 선생님이 맡은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의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노트를 한 장 찢어서
그 위에 무언가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여학생의 책상을 넘겨다보니
‘난 할 수 없어’라는 제목 아래로
아주 진지하게 종이를 채워가고 있었다.
난 천천히 책상들 사이를 지나가며
다른 학생들의 종이를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난 축구공을 멀리까지 찰 수 없어.”
“난 세 자리 숫자 이상은 나눗셈을 할 수가 없어.”
“난 데비가 날 좋아하도록 만들 수가 없어.”
“난 아무리 해도 쿠키를 하나만 먹을 수가 없어.”
호기심이 생긴 나는 교사인 도나 선생님은
뭘 하고 있나 살펴보기 위해 교탁으로 갔더니
역시 선생님이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써 내려 가고 있었다.
난 왜 교사와 학생들이
‘난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문장 대신
부정적인 문장에만 매달려 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10분 정도 지난 후,
선생님과 학생들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교탁위의
빈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들 삽을 하나씩 들고 운동장 맨 구석에서
학생 모두 돌아가며 한 삽씩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구멍 밑바닥에 아까 그 상자를 놓고
서둘러 흙을 덮어 무덤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도나 선생님은 장례식 때처럼 조문을 읽어 내려갔다.
“오늘 우리는 ‘난 할 수 없어’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떠나갔지만 그의 형제자매인
‘난 할 수 있어’와 ‘난 해낼거야’ 그리고
‘난 당장 할거야’는 늘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난 할 수 없어’여, 편안히 잠드소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가 없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교실로 들어가 그들은
조촐한 축하 행사를 벌이고
두꺼운 모조지를 오려 커다란 비석을 만들어
‘난 할 수 없어, 여기 편히 잠들다.’
라고 쓰고 그 밑에 그 날의 날짜를 썼다.
그 뒤로 학생이 ‘전 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할 때마다
선생님은 말없이 비석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학생은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한 말을 정정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나는 아직 그 장례식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 역시 그 날 이후로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 치크 무어맨
“대나무 씨앗 이야기”
뒷산 땅 속 바로 밑에는
산수유 씨앗과 대나무 씨앗이 살았습니다.
둘은 서로 가까이 지내다 보니
좋은 친구이자 동료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수유는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키도 빨리 자라고
노란색 꽃잎을 한 무더기씩 피워내는 것이
주변 나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나무도 매일같이 준비도 하고 노력도 했지만
멋진 꽃은커녕
남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뿌리만
이리저리 퍼져나갈 뿐이었습니다.
세상은 대나무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다섯 해가 지날 동안 겉으로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나무는 굳건한 의지로
비록 자신이 어두운 곳에 있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대나무는 싹을 틔웠고
변화는 너무나 짧은 시간동안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꼼짝 않던 대나무가
단 1년 만에 12 미터가 자라버린 것입니다.
-
모든 씨앗은 싹을 틔우기 전에
어두운 땅 속에서 생명이 의지 확인과 노력의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씨앗인지에 따라 만개하는 시점은 다르겠지만
결국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느냐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때를 위해 노력하고 도전한 시간들의 소산입니다.
“취업준비생의 고민”
문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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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방대 디자인학과 졸업예정이고
다른 이태백 일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군데 이력서를 넣고 있는 와중입니다.
연락 오는 곳은 별로 없고 무언가 불안하면서도
편안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고 있지만
솔직히 제가 무엇을 하고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의 전공인 제품디자인을 하고 싶다가도
디스플레이를 하고 싶기도 하고
영화공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제품디자인을 하자 라고 하면 평생 영화공부는커녕
영화 찍는 것도 구경하지 못할 듯하고
영화공부를 하자고 하면 학교다닐 때 했던
과제들의 즐거움이 떠오릅니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하니 직장을 다녀야 할듯해서
계속 이력서는 넣고 있지만 만약 회사에 다닌다면
영화공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영화에 미쳤다든가 비범하다든가 하는
인간극장에 나올법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서 다른 것을 병행하기란 힘이 들것 같습니다.
아 정말 모르겠습니다.
올해 후반에 있을 영화교육기관(?)
시험을 보고싶은데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매달려야할까
아니면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해야 할까.
그렇다고 영화라는 것이
내 평생 직업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힘들고 배고픈 그 직업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나.
또한 4년 동안 했던 디자인은. 대체...
기대를 걸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놔두시겠지만 그래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호강을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마는 그 "안정된"직장생활의 끝에는
나의 꿈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백수가 되어 이것저것 가릴 때는 아니지만
신중하고 싶습니다.
섣불리 조금 앞만 바라보고 결정했다가는
나중에 후회 할 일들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기를
일단은 취직을 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화 쪽이나 디자인 쪽으로
유학을 가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but 회사를 몇 년 다니면 유학을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영화교육기관에는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부메랑처럼 또 따라옵니다.
횡설수설 앞뒤 안 맞는 소릴 해댔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이 행복한 고민일까요.
어쩌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하는 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많이 사신 사회선배님들..
지금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나이가 들어서도
그때 나 정말 잘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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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혜밴드의 김형태씨의 답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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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요즘 20대 청년실업자의 전형입니다.
20대가 왜 그렇게 취직하기가 어려운줄 아십니까?
사람들은 불경기라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20대들이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들도 모두 못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하는 것은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수 있을까만 궁리합니다.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이죠.
그럼 세상은 어떤지 이야기 해드리죠.
취업문이 좁다고들 난리지만,
사실 모든 회사에서는 새로운 인재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세상은 자꾸 변해가고 경제구조도 바뀌어가니까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회사에 들어와서
젊은 피를 수혈해줘야 하는데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고 일에 대한 열정도 없이
그저 돈만 바라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회사입장에서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조금만 더 나은 봉급을 주는 직장이 나타나면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둘 사람들로 보이고,
또 그들이 기대하는 젊은 혈기와
창의력도 없이 누구나 학원 좀 다니면
딸수 있는 뻔한
희망을 가지고 기회를 잡고 변화를 만들어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 이우근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 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사진에 있는 라이터는
전쟁이 끝나고 발견된 것입니다.
'죽으면 나는 천국에 갈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인생을 지옥에서 보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도전을 주저하지만,
사실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잃는 것은 많지 않다.
“1만 시간의 법칙 - 그 위대한 결과”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말콤 글래드 웰 - <아웃라이어> 저자
-
많은 연구가들은
어느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시간으로 계산하였다.
그것은 바로 1만 시간이다.
-
1964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세계를 흔든
네 명의 영국 시골 청년, 비틀즈
그들은 영국의 한 시골에서 밴드를 결성했다.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제대로 된 연주 교육도 받아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하나
노력.
언제나 멜로디를 입으로 흥얼거렸고
항상 종이 위에 가사를 쓰며
매일 12시간 이상 공연과 연습을 반복했다.
1만 시간의 노력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미국 빌보드 1~5위 모두 석권
일주일간 미국 전체 음반 판매량 60%
해체까지 13장의 앨범과 20곡 넘버원 히트송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팝밴드로 기억되는
비틀즈의 가장 큰 무기는 노력이었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증명하는
또 한명이 있다.
무관심속의 '피겨변방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빛낸 챔피언 ‘김연아’
7살에 피겨를 시작해
매일 2시간동안
55회의 러츠점프를 연습하고
6시간 동안 훈련을 했던
연습벌레
훈련이외에도 국제화에 대비하여
영어인터뷰 구사가 가능하게 노력했던
공부벌레
학창시절의 기억과 맞바꾸어
끝없는 노력으로 일구어낸
'세계 1위'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히
꿈, 열정, 노력이 아닌
더 큰 꿈
더 강한 열정
더 많은 노력입니다.
"그림자"
자신의 그림자가 마음에 안 들고
자신의 발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와 발소리를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좋은 수가 생각났다.
그림자와 발소리에게서 달아나자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을 땅에서 땔 때마다 발소리가 들렸으며
그림자는 쉬지 않고 따라왔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빨리 뛰지 않은 데서 찾았다.
그렇게 뛰다가 마침내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는 사라지며,
고요히 앉아 있으면 발소리가 사라진다.’는
당연하고 타당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장자의 '우화',
모두가 이런지 모른다.
너무나 타당한 진리를 옆에 두고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으면서...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가고 있는가?
"강철왕 카네기의 유년시절"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어렸을 때에 모두가 인정한 장난꾸러기였다.
그가 9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얻었다.
그때 카네기는 버지니아 주의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새어머니가 온 후에
그의 집은 다소 넉넉해졌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카네기를 소개하며
“앞으로 이 골치덩어리를 조심해야 할 거요.
내 속을 보통 썩이는 게 아니거든.
어쩌면 내일 해 뜨기 전에
당신한테 돌을 던질지도 몰라요.
아니면 다른 못된 짓을 벌이든가.
아무튼 당해 내기 힘든 녀석이요” 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새어머니의 반응은 카네기의 예상을 빗나갔다.
새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카네기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아버지를 보고 말하였다.
“당신이 틀렸어요. 이 아이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골치덩어리가 아니에요.
사실은 아주 똑똑한 아이에요.”
새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카네기는 마음이 따스해졌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 말로 인해 새어머니와
카네기 사이에는 우정이 싹텄다.
이 한마디 말 덕분에 카네기는 후에
스물여덟 가지 성공의 황금법칙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새어머니가 오기 전에는 아무도
그의 영리함을 알아주지 않았고
아버지와 그의 이웃들은 그를 그저
골칫덩이 장난꾸러기라고 야단만 쳤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해 준
한마디는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새어머니의 열정을 이해했고, 좋아했다.
새어머니의 열정은
카네기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했다.
그런 덕분에 카네기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어린이는 백지와 같아서 어떠한 인간으로든지
말들 수 있다. - J. 로크
화창한 일요일! 얏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 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컴버거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아.
위로 올라갈 때도 있고 아래로 내려갈 때도 있지.
그런데,
이걸 즐길지 아니면 비명을 지를지는
너의 선택이야."
"레고의 개방과 공유"
덴마크의 레고는 창립 후,
오랜 세월 동안 장난감 특히 블록 분야에서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뜻밖의 경쟁자를 만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기존 장난감과는 차원이
다른 비디오, 컴퓨터 게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어린 고객들의 마음을
이 기업으로부터 빼앗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회사의 활동 영역은 점차 좁혀졌습니다.
트렌드를 선도하던 레고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레고의 역사상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 시기에 찾아 왔습니다.
회사는 스스로에게 2 가지 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첫째는 왜 블록은 움직여서는 안 되지?
둘째는 왜 어른은 레고의 고객이 될 수 없지? 입니다.
레고는 이 2 가지 생각의 굴레를 깨뜨렸습니다.
1998년 MIT 와 손잡고 로봇인 마인드 스톰을 출시했고
1999년에는 어른과 마니아 고객층을 겨냥한
스타워즈시리즈를 내놓았습니다.
특히 성인 고객층을 공략한 전략은
뒤에 회사의 큰 자신이 되었습니다.
회사엔 Afols라는 성인 동호회가 있는데
전 세계 회원이 25만 명에 이릅니다.
어른이 고객이 됨으로써 제품의 가격대가
올라간 것은 물론입니다.
레고는 인터넷 해커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마인드스톰을 개발했을 때의 일입니다.
소비자들이 제어장치 프로그램을 해킹해
마음대로 바꾸어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레고의 기술을 무단으로 도용한 셈입니다.
그러데 경영진은 숙고 끝에 소비자들이
마음껏 활용하도록 프로그램 원본을 아예 공개해버렸습니다.
기술을 스스로 유출해버린 겁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소비자들이 경쟁적으로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과정에서 성능에
엄청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예전에는 단순 동작만 가능했는데
이 후에는 계단 오르기등 복잡한 동작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탄력을 받은 회사는 2003년에
아예 고객 스스로 온라인에서
설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레고 디지털 디자이너 프로그램이 그것입니다.
현재 회사에 고용된 디자이너는
고작 120명 정도인 데 반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자발적인 디자이너는 12만 명이나 됩니다.
물론 이들은 돈 한 푼 받지 않습니다.
회사는 이들 자발적인 디자이너 가운데 활동이
활발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난 사람을 가려
‘레고 대사’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본사로 초청해 디자이너와
직접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하고
좋은 아이디어는 실제 상품으로 만듭니다.
레고야 말로 ‘개방과 공유’라는 디지털 비즈니스
환경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기업입니다.
요즘 화두로 떠오른 개방형 혁신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창의력을 얻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참고 자료 / 혼창통, 이지훈 지음
"자기가 갖지 않은 재능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라.
당신의 가치는 당신 자신이 만드는 틀에 의해 결정된다.
많은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 콘래드 힐튼
-
호텔왕 콘래드 힐튼은
호텔 벨보이에서 시작해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
250 여개에 이르는
힐튼 호텔을 세운 사람이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는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하여 세계적인 호텔 재벌이 되었습니까?"
힐튼이 대답했다.
“노력이지.”
그러자 장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버지, 물론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버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아버지 회사 만해도 아버지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힐튼은 대답했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
노력 외에 재능도 있었구나.“
이번에는 차남이 끼어들었다.
“보세요 아버지, 호텔에서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 치고
아버지 만한 재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구요.“
그제서야 힐튼은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Have a dream!"
'꿈을 가져야 한단다.'
38센트의 봉급을 받던 벨보이 시절
나는 세계에서 제일 큰 호텔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외치면서
그 호텔의 주인이 된 나를 생생하게 꿈꾸곤 했단다.
그때 내 주위에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처럼 강렬한 꿈을 가졌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단다.
얘들아,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렴.
지금도 여전히 호텔 직원으로 머물러 있는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꿈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 밖에 없었단다."
- 이지성의 『18시간 몰입의 법칙』 중에서
“컴플렉스가 없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컴플렉스다.”
일어와 영어를 독학으로 마스터,
전 아프리카 보츠와나 직업학교 교장,
컬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석사,
2012년 국민훈장 목련상 수상,
그리고 현재
밀알 복지재단 아프리카 권역본부장을 맡고 있는
134cm의 작은 거인 김해영 씨.
그러나 그녀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홧김에 저지른 아버지의 실수로
척추장애를 가지게 되어 134cm에서 키가 멈췄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아버지의 죽음마저도 그녀의 탓이 되고
더욱더 심해진 어머니의 학대로 가출 결심하고
첫 월급 3만원에 입주가사 도우미 시작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그보다 더 심한 편견과 따가운 시선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죽고 싶은 마음도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보고
죽으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인생, 살아가는 동안 마음 아픈 일은 안 시킬게."
그 후 가사도우미 일을 그만두고
기술학교에 진학하고 편물기술을 배운지 2년 만에
전국장애 기능 경기대회에서 1등,
1985년 세계 장애인 기능 경기대회에서 금메달,
철탑 산업훈장수상까지
모두 19살에 이뤄낸 쾌거이다.
그녀는 대학진학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지만
재수, 삼수 실패를 하면서
"내가 과연 대학 문만 두드리고 있을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1년 간 자원 봉사를
결심하면서 다른 문을 두드려 본다.
처음 마음먹었던 1년이 3년이 되고,
3년이 5년, 5년이 10년이 되면서
결국 14년간 아프리카 생활을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키 작고, 못생긴, 장애인 여자아이였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차별 없이 ‘인간 김해영’으로 대해줬다.
그러면서 그녀는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나를 인간으로 대해준 보츠와나와 같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사회복지사가 되자!"
그녀는 새로운 꿈이 생기자
14년의 아프리카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학기 시작했을 때 만해도
수중에 100달러(약11만원) 밖에 없어
포기할까? 그만둘까? 많이 고민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를 포기하지 않게 잡아주었던 것이
태어난 지 3일 만에 척추장애가 된 어린 시절의 김해영이다.
그렇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컬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아
지금은 밀알 복지재단 아프리카 권역본부장을 맡고 있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 가지고 있잖아요.
부모도 형제도 건강도.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다 가져서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왜 좌절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최대 문제점은
모든 것을 다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결핍을 찾으세요.
결핍이 자산입니다.
결핍이 행동을 만듭니다.
* '김미경쇼',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한 김해영씨 영상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J-q29LyVk8o
http://youtu.be/o7jWHGLnl30
‘충무공 이순신’
1. 쓰시마해전의 도고 헤이아치로
“나를 넬슨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제독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장수다.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제독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 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제독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제독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도...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제독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
2. 아오야기 난메이, ‘이조사대전’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중달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명나라장수)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
1592년 이순신제독의 한산대첩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4대해전 중 하나로
세계 여러나라의 해군사관학교의 생도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다.
" 어제는 지나버렸고
내일은 알 수 없지.
하지만 오늘은 선물이란다.
그래서 현재(present)라고 한단다. "
“슈퍼카가 뭔지 보여주마!”
모든 남성들의 드림카인 람보르기니는
원래 농기구용 트랙터를 만드는 회사였다.
평소 자동차 매니아였던
창업주 페루치오 람브로기니는
스포츠카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페라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의 창업주인,
엔초페라리에게 자신의 페라리 차량의
잦은 클러치고장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엔초 페라리는,
"트랙터나 만들던 사람이 슈퍼카를 어떻게 알겠소?
트랙터나 운전하시오!"
라며 농기계를 제작하는 사람이 스포츠카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투로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슈퍼카의 명가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문전박대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은
람보르기니는 화가 난 상태로
공장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페라리의 클러치를
살펴보니, 자신의 트렉터에 사용되는
클러치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차를 분해해 보면서
자신도 슈퍼카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된다.
그 후, 페루치오 람보로기니는
엠블럼처럼 황소같은 뚝심으로
페라리의 스포츠카에 대적할 만한 차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963년 람보르기니 자동차 회사를 만든
그는 결국 ‘미우라’를 1966년
제너럴 모터쇼에서 발표하게된다.
당시, ‘미우라’는 가장 빠른 스포츠카였다.
이때부터 명품 스포츠카를 제작에 주력하게 되었고,
1974년 출시한 ‘카운타크’는
지상 최고의 스포츠카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른다.
그는 사업의 성공으로
엔초 페라리에게 멋지게 복수를 하였다.
만약 람보르기니가 문전박대에 모멸감만
느끼고 돌아섰다면 람보르기니라는
자동차 브랜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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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LP700-4
상남자의 책임감
“정말 이 일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1995년 11월.
40년간 수제화를 만들어 오던 남궁정부씨는
동료들과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기위해 신도림역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넘치는 역에서
그는 밀려 밀려 지하철 승차대 바로 앞에 섰고
실수로 철로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빛 아래 수술대에서
너덜해진 오른 팔을 잘라내고 그는 퇴원했다.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집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의수를 맞추러 간 가게에서
자신이 사고 전에는 구두장이였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인이 ‘장애인을 위한 구두’를 만들어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 순간 그는 결심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두를 만들겠다고.
그러나 평생을 만들어 눈감고도 만들던 구두가
쓰지도 않던 왼팔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왼팔을 제대로 쓰기 위해
왼손으로 글을 쓰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렇게 힘을 얻은 왼손을 비롯하여
입으로 물고, 가슴으로 잡아가며
온몸으로 구두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구두를 만들어 준 사람들은
5만 명이 넘는다.
목발을 짚던 분이 그가 만든 구두를 신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고
발이 기형이라 걸을 수 없던
7살짜리 아이의 신발을 만들어주고 듣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그가 사는 행복이라고 한다.
-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현실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른 팔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오른 팔 빼고 다 있는 거지요.”
성공하는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보이는 곳은?"
에펠탑이 완성되자
에펠탑 건설의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작가 모파상은
에펠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자주 식사를 했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아니 선생님은 왜 이곳에서 식사를 하십니까?"
모파상은 대답했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곳은 여기뿐이지 않소!"
-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소설가.
장편《여자의 일생》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 외《비곗덩어리》,《피에르와 장》등이 있다.
무감동적인 문체로, 이상 성격 소유자,
염세주의적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Planet Dream】이벤트 ★
스펙을 좇느라 꿈을 잊은 여러분에게
스펙을 버리고 꿈을 좇아 떠나
마침내 그 꿈을 이룬 청년의 이야기,
강남구씨의 『청춘, 거침없이 달려라』
10권을 드립니다!
댓글로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말하면 이벤트 참여 완료!
꿈을 응원해 줄 친구 소환하면 당첨확률이 쑥쑥~
* 당첨자는 18일에 댓글로 발표합니다. ^^
"우리 아버지의 교과서"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에 있는 작고 오래된 아파트.
그곳에 어머니, 아버지, 형과 함께
살고 있는 제 이름은 노희주,
스무살 재수생입니다.
올해 57세가 되신
특별한 저의 아버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본인이 직접 만든 헤드폰으로
매일 EBS 수능 강의를 듣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식당 보조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공부를 멈추지 않습니다.
중졸 학력,
막노동 일을 하시는 우리 아버지.
뒤늦게 대학에 가고 싶으신 걸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의 선생님입니다.
중학교 시절
저는 머리에서 진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아토피로 힘들어하고
형은 게임 중독으로 방황했습니다.
결국 저희 형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우리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먼저 공부하시고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저보다 두 살 많은 우리 형, 노동주.
201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4년 국가장학금을 받고 있는 우리 형은
"서울대에도 아빠처럼 공부한 사람은 없더라."
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저는 형만큼,
아니 그 이상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8년째 계속 되고 있는 아버지의 수능공부.
그런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서
보고 또 보고 쓰고 또 썼어요.
글씨가 지워질 만큼 보니까
그 내용이 머릿속에 새겨지더라고요"
- EBS 다큐 '어느 아버지의 교과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노희주 군은
2013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우수 장학생으로 입학,
영화를 공부해서 나중에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합니다.
"한사람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모두가 함께 꿈꾼다면 현실이 될 수 있다!“
-
'박완규의 산골음악회'가 폐교 위기에
몰린 산골학교를 살려냈다.
2008년부터 '작은 학교 살리기' 라는 좋은 취지로
삼척 MBC가 제작하는 음악 프로그램인
'산골음악회'는 폐교위기에 놓인
벽지마을 산골학교를 찾아다니며
5년째 진행되고 있다.
평소 '산골음악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수 박완규도 자청해서 출연료를 재능기부하며
MC 자리를 요청했고 삼척 도계중학교
공연녹화를 시작으로 박완규의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한 아름다운 음악회가 시작됐다.
박완규의 MC투입 이후,
윤종신, 김경호, 이은미, 신효범,
하림, 조정치, 여행스케치, 임지훈, 자전거를 탄 풍경 등
다양한 연령대를 겨냥한 가수들이 출연해
벽지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중 전교생이 고작 5명인 정선가수분교는
이제 곧 졸업할 6학년 2명의 학생을 제외하면
교과부의 소규모 학교통폐합권고를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13년 입학할 학생이 없다면
곧바로 폐교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곳에 MC 박완규와 함께 부족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취지에 동참해 선뜻 게스트로 출연해준
가수 바비킴과 조장혁의 출연으로
50여명도 채 되지 않는
마을에 1000명이 넘는 관객이
시골 분교교정을 가득 메웠다.
공연이 끝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학생들을 큰 학교로
전학을 시키지 않고 다른 마을에서도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학부모들이 이사를 와서
지난 4일 입학식에는 6명이나 새로 입학하게 된 것.
프로그램 담당 하현재PD는
"한사람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모두가 함께 꿈꾼다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MC 박완규 씨를 비롯한
모든 제작진과 관객의 하나 된 바람이 가수분교를 살렸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박완규 역시 "무관심의 결과는 너무도 처참합니다.
관심의 시선 하나로도 세상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의미심장한 소감을 전했다.
세계일보 2013.03.13 한준호 기자
기사링크 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cateid=1032&newsid=20130313150007981&p=segye
"삶에서 큰 변화를 만든다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심지어 더 무서운 건 뭔지 알아?
후회야."
마이클 잭슨 아버지가
아들보고 복서가 되라고 했다면
모하마드 알리 아버지가
아들보고 가수가 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재앙이지.
뭔 말인지 알겠냐?
- 영화 '세 얼간이' 중에서
"모차르트와 음악신동"
모차르트가 어느 날 음악 애호가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집의 12살 난 아들은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
그 소년은 모차르트를 보자 얼른 질문을 하였다.
"저는 작곡이 무척하고 싶습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신동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던
모차르트는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너는 너무 어리다. 난 그말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자 소년은 매우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더 어려서부터 작곡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누구에게 묻지 않았다."
"난 혼자 했어."
-
이 일화를 보며 ‘천재의 패기’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신동, 천재라고
칭송 받던 그 였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언제나 고독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물론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소리가 사치스럽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 나름의 고민이 있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누군가 앞서 나가있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부터 내려오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스스로 배워야만
하는 것들 또한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물어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가 문제에 봉착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할까요?
자라나는 어린 새싹을 보며,
모차르트는 그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에 탐미되어
조금은 오만했던 자신을 되돌아봤을지도 모릅니다.
이 어린 소년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어려움 속에서 배우는 것이 있기를,
그리고 보다 겸손한 자세를 배우기를 바라는
어른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얼굴 없는 천사”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에는 9년째
연탄과 장학금을 기부하는 분이 계십니다.
금가면 사무소로
독거노인 분들을 위한 연탄,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직접 쓴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매번 이름을 바꿔서 보내기 때문에
그의 본명조차 알지 못하고
그의 정체에 대한 추측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자식이 없는 재력가가 보내주는 것이라
추측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있으면
학자금, 결혼 자금에 남을 도울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씀씀이를 줄여 티끌을 모은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또 글을 쓴다는 것이
살아있는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기회가
된다는 걸 배우며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금 일백만원을 보내드리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편지를 보내시며 매번 기부금을
면사무소로 보내주셨습니다.
지금껏 보내준 편지들을 토대로
이분을 찾아보고자
방송국에서 나섰습니다.
단서는 고향을 떠난 지 39년이라는 말과
편지에 써진 ‘안준기’라는 성함과 주소
조사와 수소문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곳은
한 고물상에서였습니다.
그는 ‘재활용 나눔회’라고 써 있는 리어카를 끄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이미 70세가 넘은 나이로 교도관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고물상에서 폐지를 팔아서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예상과 다른 할아버지의 모습에
“재활용 나눔회에는 어떻게 동참할 수 있어요?”
라고 여쭈어 보니
“동참할 의향이 있으면 뭐 이렇게 박스
하나씩 도와주면 되죠.”
라며 기분좋은 웃음과 함께 대답하셨다.
리어카를 한가득 채워오면 100kg 정도인데
6000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밤새도록 줍고 덜 자고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십니다.
할아버지는 고향마을 사람들이 생각했던
재력가도 아니었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배움에 대한 아쉬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추운 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이웃들 생각만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면사무소로 보낸 편지 -
“남이 밥 먹을 때 죽을 먹으며
남이 죽을 먹을 때 물을 마시며
살아 온 옛날이 있기에
배우고 싶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변하지 않는군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연탄 몇 장이라도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연탄 1,000장 대금 30만원을 보내드리오니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보내드리며 죄송할 따름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궁금한 이야기 Y - 2012년 12월 28일 방송분.
"마지막에는 모든게 괜찮아 질거야.
만약 괜찮지 않다면,
그건 아직 끝이 아닌거지."
“순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어느 날 부자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의 남루한 차림새를 본 종업원은
쓰던 비누와 낡아빠진 수건 한 장을 건냈습니다.
한참 후 그 남자는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종업원에게 팁으로 금화 한 닢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종업원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내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더라면
더 많은 금화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그 부자가 다시 목욕탕을 찾아 왔습니다.
종업원은 첫 눈에 그를 알아봤습니다.
얼른 뛰어나가 가장 좋은 비누와 수건을 준비했고,
목욕하는 중에는 무료로 마사지도 해주었습니다.
몸을 닦고 난 후에는 좋은 향수도 뿌려주며
마치 왕이나 받을 만한 서비스를 해주었습니다.
목욕이 끝나고 부자가 옷을 입고 걸어 나오자
종업원은 잔뜩 기대를 했습니다.
‘오늘은 팁을 얼마나 주실까?’
그런데, 웬일입니까?
부자가 그에게 준 팁은
딱 100원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어이없어하는 종업원에게 부자가 한마디 건냅니다.
“이 동전은 지난 번 서비스에 대한 것이고,
지난 번 금화는 오늘 서비스에 대한 것이네!”
-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노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결과가 돌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과분한 보상이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살이는
운이 7이요, 기술이나 노력은
3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순서가 바뀌어서 올뿐
노력에 대한 보상은 공평합니다.
- MOG EDUCATION 이형준 칼럼 중
이번 김연아 선수가 참가한 대회를 보면서
2007년 세계선수권 대회가 생각났습니다.
그 당시 여러 외신에서도 편파판정의
논란이 일었던 그 대회입니다.
“마오는 넘어진 후 20초간 안무가 없었다.
1위 자격이 없다.” 란 기사,
그리고
한 외신의 보도 자료인
이 글의 사진을 보면
실제 동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를
금메달 위치에 배치해 놓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편파판정의 희생이 되었던 대회였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점수를 후하게 못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또 편파판정의 희생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한 동작을 익히기 위해서 만 번을 연습합니다."
라고 말하는 지독한 연습벌레인 김연아 선수,
꼭 노력의 대가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
밑에 글은 2007년 세계선수권 후 김연아 선수가
미니홈피에 썼던 글 입니다.
이젠 쉴 수 있어..ㅠㅠㅠ(머리가ㅋㅋ)
시즌이.......끝났다ㅠ
우왕ㅋ굳ㅋㅋㅋㅋ아기다리고 기다리던 오프시즌..ㅠ
작년에도 이런 글을 썼었더랬지..ㅋ
지난 시즌처럼 이번에도 끝이 쫌.. 그랬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지난여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체력훈련과
그야말로 훈련같은 훈련을 해보았다.
와..어떻게 내가 그런 것들을 이겨냈는지...
그땐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다..ㅋ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나(ㅋㅋㅋ) 뭐이런생각들이..
매일매일 머리 속에 맴돌았다.
이제 와서 포기하기엔 나를 지켜보고 기대하는 사람들과
나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이미 늦어버린..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킹왕짱!! 짜증 날 정도로 뜨거운 햇빛아래서
죽어랏! 뛰어댕겼다..
약 2달정도..일주일 두번씩.. 그 두 번..
별거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월욜,목욜이 두려웟다..ㅠ
어느 날.."피할수없다면 즐겨라"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래, 함 즐겨보자~!! 라고 맘먹었었었었었다..
하지만 하루로 끝났다..ㅠ
피할 수도 없었지만 즐길 수도 없었다ㅠㅠㅠ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을 하면서 인내심도 키우고
그렇게 힘든 것을 견뎌내고 이겨냈기 때문에
웬만히 어려워선 거뜬히 넘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정말될진모르겠지만ㅋ).
첫 시합을 끝내고
"아 이런게 시합이구나.."이 생각부터 들었다.
지난 시즌 내가 너무 시합을 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내 상황이 그랬으니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합하나 치루기 버거웠다.
근데 이번시즌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그냥 연습하던 것을 그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잘하든 못하든.
이번시즌은 긴장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굳이 꼽으라면 중국시합 때 조금, 파이널 프리 날 마니마니..ㅋㅋ
정말 걱정될 정도로 안 떨었던 적은 이번 프리였다.
너무 긴장을 안해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런 것들도 모두 완벽한 준비와
내 연기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던 것 같다.
이번시즌 숏트프로그램을 한 번도 완벽하게 한 적이 없어서
솔직히 내자신한테 실망스러웠다.
숏트 끝나고 생각이 복잡했다.
끝나자마자 인터뷰를 하면서도 입과 머리속이 따로 놀았다.
말을 하면서도 머리에선 딴생각들만 맴돌았다.
울음이 나올랑말랑 했다..
통증도 있었고 이대로 프리에서 괜찮을까...
아..정말 숏트가 이렇게 돼버리니 프리가 더 걱정이다..
자신이없다.. 그냥 기권해버릴까..
안돼 ..그래도 하고싶다..잘하고싶다.. 울고싶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인터뷰를 했다니 신기하다..ㅋㅋ
그러다가 불과 몇 시간후에 괜찮아 졌지만..
프리하면서...솔직히 말해
스텝시퀀스 하다 쓰러지는 줄 알았다ㅠ
그래도 큰 실수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수가 좀 짠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쩌겠어, 이미 지난일인데..
우긴다고 될 일도 아닌데.. 내가 못한 것도 있고
동메달 딸 팔짜였나보지..ㅋㅋ
정말정말 난 일등하려고 피겨를 하는것이 아니니깐.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생각도 마니하네 참.ㅋ)
자기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한만큼 점수를 받고 그 점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지
누군가와
"그래. 과거가 상처가 될 수 있지.
그렇지만 그걸 바라보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단다.
너는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도 있고,
과거로 부터 배울수도 있다는거지."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아라
시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해라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가젤 영양이 잠에서 깬다.
가젤 영양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뛰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것을 안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아침
사자가 잠에서 깬다.
사자는
가장 느린 가젤 영양보다 더 빨리 뛰지 않으면
굶어 죽으리란 것을 안다.
사자냐 영양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태양이 떠오르면 뛰어야 한다.
-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 中
채플린이 무명시절 철공소에서
일을 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일 때문에 바빴던 사장이
그에게 '빵'을 사오라고 부탁했다.
저녁시간이 지나서야 사장은
채플린이 가져다준 봉투를 열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빵과 함께 와인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사장은 채플린에게 이유를 물었다
채플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장님은 일이 끝나면 언제나 와인을 드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와인이 떨어진 것 같아서
제가 둘 다 사왔습니다."
채플린의 말에 감동을 받은 사장은
채플린의 일당을 올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그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
이 에피소드는 채플린이 이후 세계적인 배우로
출세한 이유를 밝혀준다.
채플린은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을 다할 줄 알았던 것이다.
채플린을 코미디의 달인으로 만들어 준 2%는
'마음'을 다하는 정성이었던 것이다.
- 차동엽의 『무지개 원리』中에서
“나는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다”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입만 하나 더
늘려놓았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어서 집을 떠나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잡지를 팔고 가정교사를 하며
어렵사리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도 대학에는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야.
네 오빠 공부시키기도 빠듯하다.”
할 수 없이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미국 선교사에게 가정부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이라고?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느니
차라리 미국으로 가자. 미국은 기회의 땅 이라잖아.
열심히 일하면 될 거야.”
그녀는 비행기표만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단돈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간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버루크 대학에 등록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 합기도 사범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했지만
그에게는 숨겨놓은 자식도 있었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 아내에게 손찌검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매일같이 휘두르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여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훈련은 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우수 훈련병이 되었고
사우스 캘로라이나 포트잭슨에서
보급 주특기 훈련을 마친 후
본격적인 군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근무지는 공교롭게도
미 2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서울 용산이었고,
6년 만에 미군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장교 시절,
독일과 일본에서 해외 근무를 하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마흔 두 살인 1990년에는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미군 대위 신분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더 공부하려면
군인의 길을 접어야 했기 때문에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해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 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 과정을
훌륭히 이수해 2006년 59살의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기회와 희망 없이 사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적 편견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진규는 끊임없이 기회를 찾았습니다.
미국 행은 서진규에게 아주 커다란 기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위험하고 허무맹랑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녀가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요?
기회를 얻으려면 늘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기회는 오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남의 차지가 됩니다.
그녀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미국 국무장관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꿈대로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꿈을 꾸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이루고 보면 그 꿈이 나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걱정하는 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 막지 않아
단지 네가 좋은 일을 즐기는 걸 막을 뿐이야
‘돈’이 되는 특허권 제의 거절!
크림전쟁을 위한 무기 개발 참여 거부!
영국 왕립연구소 회장직 거부!
기사작위 거부! 초호화 저택 거부!
역사상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
영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페러데이(1791-1867)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 밖에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했던
그가 택한 직업은 제본소 수습공이었다.
열세 살에 제본소에 취업한 그는
자연스레 유명한 학자들의
원고를 제본하게 된다.
그리고
겨우 읽고 쓰는 교육만을 받은 그가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일은
매일 밤 숨죽이며
고객이 아직 찾아가지 않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제본소엔 정말 책이 많았다네.
난 그 책들을 모두 읽을 수 있었지.”
그렇게 그는 난생처음 자신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무 살
제본소 수습공인 그에게 과학자의 조수라는
꿈같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그 후로 과학자가 된 그는,
어려운 과학이론을 몰라
똑같은 실험을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어떤 과학자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발견을 해내기에 이른다.
“자기장을 전기로 변환 시킬 수 있다!”
이 발견으로 인해
전기의 대중화가 시작되게 되었다.
제본소 수습공 출신으로부터
이루어진 엄청난 업적이었다.
이런 그의 업적을 기려 사람들은
뉴턴과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는 죽어서 얻게 되는 최고의 명예였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작은 공동묘지에
묻히길 원합니다. 내 친구들도 모두 거기 있으니까요.
대신,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고 꿈조차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과학강연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일흔 살의 못 배운 과학자의
그리고 하찮고 흔한 양초 한 자루로
시작된 강연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그답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들로
과학을 설명한다.
“어떤 다이아몬드가 이 불꽃만큼 아름다울 수 있겠니
양초의 불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불꽃이 없으면 결코 빛날 수 없단다.”
-마이클 페러데이의 크리스마스 강연 中
이미지는 영국 20파운드 지폐 뒷면의
마이클 페러데이입니다.
감청색 수트를 입은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빅 블루(Big Blue)’ IBM이
엄청나게 우울한(Big Blue) 공룡으로 전락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거대해진 기업은
급변하는 세계시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경영 악화와 생산성 하락으로
1990년대 초반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IBM을 알고 있는 모든 이가 깜짝 놀랄 일이었다.
창업 이후 70년 동안 흑자 행진을 멈춘 적이 없고
세계 컴퓨터 시장의 90%를 독점하고 있는 이 회사에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993년,
대대적인 감원과 매각,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 뒤에 신임 CEO 루이스 거스너가 있었다.
“지금 IBM에 필요한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백기사가 장밋빛 희망을 보여주기 바랐던
주주들은 그의 한마디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주가는 연일 하락했습니다.
작달막한 키의 중후한 신사였던 그는 그렇게
취임 후 석 달 동안 줄곧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상황 파악에만 몰두했다.
그는 상황 파악이 끝나자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무, 마케팅, 영업 등 핵심 보직이 모두 교체됐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전과 전략이 발표됐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IT기술을 통합해 고객을 만족시킨다”
그것이 IBM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고객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IBM의 주가는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스 거스너가 물러난 2002년
주가는 1993년 대비 열 배가 올랐습니다.
길고 어두웠던 10년의 터널을 빠져 나온 것입니다.
-
절망적 상황을 맞았을 때
천하의 강심장이라도 당황하는 건 당연합니다.
당황한다는 것은
사실과 감정이 마구 뒤섞인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설익은 희망과 비전이 난무합니다.
노련한 거스너의 훈수를 잊지 마십시오.
“난세엔 사실 파악부터, 그 다음엔 사람, 그 후에 비전과 전략을.”
- MOG EDUCATION 이규창 칼럼 중
‘딸의 편지’
“내 딸의 편지는, 우리의 가방 같은 곳에
넣어져 있었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있었던 거죠.”
“딸과 여행을 갈 때 가지고 갔던
검은 배낭에서 내 딸이 쓴 편지를 발견했어요.
아내는 딸이 수개월 전에 넣어둔 편지를
자신의 서류가방 옆 주머니에서 발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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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시내티에 살고 있던 엘리나는
5살 때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의사들은 약 4개월 반 정도 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나는 병마와 싸우며 약 255일간을 살았고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은 엘리나에게 심각한 병을 알리지 않았지만
엘리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엘리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와
편지 쓰기에 열중했습니다.
뇌종양으로 언어기능을 상실한 엘리나는
말할 수 없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와 그림으로 담았지만 결코 직접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엘리나의 사랑이 담긴 그림 편지들은
엘리나가 세상을 떠난 후
책장의 책들 사이, 옷장 서랍 구석,
접시들 사이를 비롯해 집안 곳곳에서
약 2년에 걸쳐 발견되었습니다.
“I love you Mom, Dad, Grace"
"나는 엄마, 아빠, 그레이스를 사랑해요.”
엘리나가 떠나고 나서야
그녀의 독특한 사랑표현을 알 수 있었던
엄마와 아빠는 말했습니다.
“엘리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계속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그녀의 편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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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otesleftbehind.com/
이곳에서 엘리나의 남겨진 편지들과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은 이 지구 위 어느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으면서
왜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지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경제학 교수인 게리 하멜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하였습니다.
꼭대기에 장대를 세워 그 끝에 바나나를 놓고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낚아채는 순간
냉수를 뒤집어쓰게 해 놓았습니다.
배고픈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를 먹기 위해
장대를 기어올랐고 바나나를 집는 순간
냉수를 뒤집어썼습니다.
깜짝 놀란 원숭이는 그 이후 아예
바나나를 먹으려는 시도를 단념했습니다.
다른 원숭이들도 똑같은 경험을 했고
결국 모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연구원들은 냉수를 뒤집어쓴 원숭이
한 마리를 꺼내고 새로운 원숭이를 넣었습니다.
새로운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기 위해
장대를 기어올랐지만 기존에 있던 원숭이들이
새로운 원숭이를 끌어내렸습니다.
결국 새로운 원숭이는 이유도 모른 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냉수를 뒤집어쓴 경험을 한 원숭이가
한 마리씩 새로운 원숭이로 바뀌었고
새로운 원숭이는 또 다시 이유도 모른 채
끌어내려졌습니다.
결국 새로운 원숭이들만 그 방에 남았지만
어느 원숭이도 장대에 오르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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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도 원숭이들처럼
타인에 의해 인생의 목표를 향한 길에서
끌어내려졌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떠올려보고는
그 생각을 바로 쫓아 버립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꿈을 단념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타인에 의해
당신이 꿈꾸는 것을 단념했다면,
이제라도 꿈을 꾸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주)에듀21 ‘최문수’ 멘토의 글 中
인내하고 강해져라.
언젠가 그 고통이 너에게
도움이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왜 와 어떻게”
장애물이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이 보이는 최초의 반응은 대개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거지?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찾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부과해야 할 벌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똑같은 상황에서
'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라고
자문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일이 제대로 되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
현재 인간 세계는 '왜'라고 묻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떻게'라고 묻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中
저의 어머니는
14살 때 차가운 쓰레기더미 속에서
저를 출산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전
뉴욕의 거리를 전전했고
무료급식과 쓰레기를 뒤지며
굶주림을 해소했습니다.
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길거리에서 키워졌습니다.
값싼 모텔과 노숙자 쉼터를
찾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고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 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이름은
'노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공부가 좋았습니다.
가진 것 없는 제가
그나마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한권의 책을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어머니와 저는 두 모녀가 감수해야 할
위험한 시선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12학년을 다니는 동안
자그마치 12 곳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에 5권의 책을 읽었고
뉴욕의 모든 신문을 정독했습니다.
거리의 길바닥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이었습니다.
꿈이 생겼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나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는 꿈.
우리 가족이 더 이상 남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꿈.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사람들은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깨끗하게 입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11학년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께 이사를 하더라도
더 이상 학교는 옮기지 않겠다고 부탁했습니다.
대학에 가려면 저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의
추천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4.0에 가까운 학점을 유지했고
토론 동아리 참여, 육상팀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모든 곳이 저에겐 배움의 장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복지단체들이 장학금으로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사회단체에서 절 지켜봐 주었습니다.
절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인생과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전 결국
브라운과 컬럼비아, 암허스트 등
미 전역의 20여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
카디자 윌리엄스!
노숙자였던 저는
지금 하버드의 4년 장학생입니다.
"전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에
언제나 자신감을 가졌어요.
남들이 '노숙자니까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걸 너무나도 싫어해요.
전 가난이 결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제 이름은 카디자 윌리엄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저를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당신은 길을 찾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변명을 찾을 것이다.
5년만 젊었더라면,
한 사람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물의 양은
자그마치 130L.
전 세계의 25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수도와 위생시설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 없이 샤워 할 수 있는
‘드라이배스(DryBath)’ 로션을 개발한
젊은 사업가 루드윅 매리쉐인의 강연 내용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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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림포포에서 자랐습니다.
림포포와 음푸말랑가의 경계에 있는
모테테마라는 작은 마을이었죠.
그곳은 수도와 전기 공급이
날씨만큼 불규칙한 곳이죠.
제가 17살 겨울 무렵,
저는 제 친구 둘과 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광욕을 하고 있었죠.
일광욕을 하는 동안, 제 옆에 있던
절친한 친구가 제가 와서 말하길,
"야, 왜 피부에 그냥 바른 다음에
안 씻어도 되는걸 아무도 발명하지 않을까?"
저는 앉은 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게 있다면 나라도 사겠다."
그래서 저는 집으로 돌아가 약간의 연구를 했어요.
그리고는 전 굉장히 놀라운 통계 수치를 발견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25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수도와 위생시설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 4억 5천만 명은 아프리카인들이며
그 중 5백만 명은 남 아프리카인들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질병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심한 건 트라코마,
티끌이 안구로 침투하여 일어나는 안구 감염증세 입니다.
이 질병에 걸려 매년 8백만 명의 사람들이 영구 실명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트라코마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세안을 하는 것뿐이라는 점입니다.
병원도, 알약도, 주사도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충격적인 수치를 보고 난 후에 생각했습니다.
"좋아, 비록 이 일을 하는 것이
단지 내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샤워하기 싫어서이지만,
적어도 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걸 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믿음직한 제 애장품인
노키아 6234 휴대전화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저에겐 노트북도 없었고
시간당 20란드짜리 인터넷 카페를 제외 하고는
인터넷도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로션, 크림, 화합물, 융해점, 독성 등에 관해서
위키피디아의 구글을 돌아다니며 연구했죠.
시간은 빠르게 흘러 4년 후
제 휴대전화에 40페이지 분량의 사업 계획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저는 이 나라에서 최연소 특허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전 '드라이배스'라는 제품을 개발해냈습니다.
세계 최초의 목욕대체 로션이었죠.
말 그대로 이걸 피부에 바르기만 하면
샤워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제가 가진 제한된 자원들을 가지고
로션을 실용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저는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사람들을 몇 명 만나게 됐고
로션의 실용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장에 내놓을 준비가 된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반으로 잘라서 짜내기만 하면
이 멋진 제품 한 봉지로
한 번의 샤워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5란드(600원)에 말이죠!
사람들이 샤워를 한 번 거를 때마다
평균적으로 8천만 리터의 물을
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골지역에 잇는 있는 아이들에게
하루에 두 시간을 절약해 주게 되어
두 시간을 더 학교에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숙제하는 데 두 시간을 더 쓸 수 있고
그 시간동안 온전히 놀면서 지낼 수도 있게 된 겁니다.
우리는 심지어 교외에 사는 부유한 아이들도
드라이배스를 매우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드라이 배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편리함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세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림포포 지역의 자갈길에서
주당 50란드(6000원)의 용돈을 받던 제가
세계를 위해 샤워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뭘 망설이고 계십니까?
작년에 구글은 저를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청년으로 선정했고
현재 저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 사업가 입니다.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받는 칭송입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로 어리둥절했던 것은
제가 했던 이 모든 것이
단지 제가 샤워를 하기 싫어서였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