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친구 최용근변호사의 글*
남자가 함부로 흘리지 않아야 할 것이 둘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눈물, 또 하나는 소변볼 때 변기 앞에 흘리는 오줌 ..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입관할 때도, 봉산 뒷산에 묻히시던 날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아무리 울려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참 많이 울었다. 여러 번 울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딱 두 번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한 번은 배가 너무 고파 붕어빵이 먹고 싶어 밤에 몰래 장독대를 열고
팔다 남은 붕어빵 몇개를 꺼내 먹다가 들켰을 때,
또 한 번은 는 할머니가 붕어빵 팔다가 화장실 간 틈을 타 몰래 붕어빵을 훔쳐 그걸 팔아 돈을 만들어 동네 형들과 화투를 치다가 들켰을 때였다
텃밭 감나무에 나를 발가 벗긴 채 묶어놓고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셨다.
<삼국지>고사를 들먹이시며
“도둑질해서 어떻게 성공을 하긋냐, 이놈아. 관우 장비는 주군인 유비를 위해서 온몸을 바쳐 충성하고 조자룡은 죽기를 작정하고 말 타고 달려 나가 주군 유비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니는 벌써부터 도둑질을 배워 엇따 쓰것냐“
감나무에 발가벗긴 채 묶여 울고 있는 초등학생인 나를 보고 캐리(우리집 개)가 달려와 컹컹 짖으며 어쩔줄 모르고 내 옆에서 날뛰었다. 캐리는 내가 기르던 개였다.
개주인인 내가 ‘고추’까지 보이는 알몸으로 묶여 울고 있으니까 환장해 죽겠는지(얘가 재밋어서인지, 지 맘이 아파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내 앞 뒤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캥캥 짖어댔다
<삼국지>를 열 번을 넘게 읽으셨다는 할머니는 내가 잘못할 땐 가차없이 <삼국지> 고사를 들먹이며 나를 혼을 냈다.
나는 <삼국지>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할머니 덕분에 <삼국지>이야기는 훤했다
할머니와 둘이서 잘 때 나에게 이런 저런 삶의 얘기를 해 주셨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하더라.젊어서 고생은 쌓아둔 재산이니 힘들어도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꿈을 꾸거라..“
할머니는 아홉 식구의 생존이 나를 공부를 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어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시켜 주지 못한 맘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난 슈베르트의 가곡 <밤과 꿈>을 즐겨 듣고 좋아했다.
대한극장 옆 가죽공장 다닐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
서울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주던 곡 ..<밤과 꿈>을 들으면서 때론 아무런 이유 없이 감동을 받아 울적해 하기도 했다
나는 밤에는 나만의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가난에 쌓인 집에서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유일한 위로는 밤에 혼자서 하는 공상이었다,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할 출구가 없을까..
큰 부자가 되는 꿈도 꾸어봤고, 장군이 되는 꿈도 꾸었다. 밤은 고단한 삶을 쉬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붕어빵을 팔면서 나에게 맘껏 먹이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다.
설은 가난했던 우리 집에도 명절은 명절이었다. 오랜만에 코끝을 자극하는 고기 굽는 냄새, 전 부치는 소리..할머니와 어머니는 부지런히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조기도 굽고 소고기 산적도 만들고,,
어린 나는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그건 알바 아니었다. 오직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고 돈(세배돈)도 만질 수 있는 날이니까..
일년에 한번 새 옷을 사주기도 했다. 할머니가 구운 붕어빵 수십마리와 어머니의 머리에 얹은 갈치 몇마리를 팔아 번돈이 내 새 옷으로 ..
설날 세배를 하면 할머니는 덕담과 함께 세배 돈을 주셨다.
“우리 용근이는 나중에 관우 장비 조자룡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할머니는 설날의 덕담도 <삼국지> 얘기로 하셨다.
서울에 와서 대한극장 옆 가죽공장에 다녔다. 예리한 칼로 가죽을 자르고 본드로 붙여 가방을 만들었다. 칼로 가죽을 자르는 일이라 가방끈과 몸통을 만들다보면 날카로운 칼에 손가락을 베인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화공약품으로 가죽을 붙여 가방을 만들기에 매캐한 화학약품을 마시면 머리가 지끈하고 아팠다. 저녁에 집에 와 공부를 할 땐 낮에 들이 마신 약품냄새로 머리가 욱신거려 몇 시간
공부하지도 못하고 그냥 잔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렇게 가죽공장 ‘공돌이‘로 일해 번 돈, 한 달 월급이 당시 3만원 정도였다. 착실히 그 돈을 모았다. 할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
그 해 설날이 왔다. 누나와 매형과 함께 고향을 갔다. 할머니, 어머니 내복도 사고, 드릴 돈도 따로 준비했다.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17시간 정도를 서서 갔다. 다리도 아프고 오줌도 마려운데도 꾹 참았다. 열차 안에는고향가는 사람들로 통로까지 빽빽해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다리 아픈 줄 몰랐다. 마려운 오줌도 꾸욱 참느라 얼굴은 시뻘개지고 방광의 오줌통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기차가 5분 쉬는 틈을 타 재빨리 내려와 더 이상 못참고 바지를 내리고 기차 플랫폼에 오줌을 갈겨 버렸다
설날 지나고 다음날 올라올 때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꺼내시더니 꼬깃꼬깃한 뭔가를 주셨다. 돈 3만원 이었다. 그러시면서
“서울 가서 배고프면 사먹어라. 하고 싶은 공부 못시켜서 미안하다, 내 새끼..“
수년 후 할머니는 구례 집을 팔고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오셨다. 사당동 판자촌에서 20년쯤 살았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당동 살면서 할머니는 종교를 바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몇 번 떨어지니까.
“너는 하나님을 믿고 나는 부처님을 믿어서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니가 시험에 안되나 보구나”하시면서 집 앞 사당동 판자촌 교회를 나가셨다.
그런 할머니가 어느 겨울 내린 눈이 얼어븥은 산동네 빙판길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셨다. 내가 학교 고시반에서 공부할 때였는데, 여동생이 할머니가 교회에 기도하시러 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지셨다고 했다.
몇 년 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제일 먼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날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서럽게 울었다. 무엇 땜에 저렇게 서럽게 우실까 했다.
할머니는 이제는 내가 죽을 때가 된 것 같다며
“인자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합격하던 다음해 시골에서 96세에 돌아가셨다.
그때 내가 엄청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운 할머니..설날이 오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남자가 함부로 흘리지 말아야 할 눈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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